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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0. 시간

2019.05.01 01:23

  오랜 시간이 흘렀다. 세상은 변한 듯 변하지 않았고, 나는 변하지 않은 듯 변했다. 정체성을 찾아 헤맨 시간들, 무너진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고자 발악했던 순간들이 덧없이 흘렀다. 아무런 관심 없는 어떤 작은 방에서, 나는 죽은 듯 살았고 산 듯 죽어 있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런 생활에는 어떤 낭만이나 매력을 찾기란 어렵다. 순간의 몽상들이나 잠깐의 발견 같은 것들이, 그것을 말로 누군가에게 전달하거나 글로 옮겨놓을 때에만 아주 작은 가치를, 그것도 잠시 지닐 뿐이었다. 글은 휴지조각보다 못한 존재였고, 누구도 읽지 않는 신문보다 가치없었다. 때로는 말보다 덧없고 힘이 없었다. 시중에는 수많은 글이 넘쳐나고, 온라인 상에도 넘쳐났지만, 때때로 자신의 감정들과 맞닿아있는, 자신의 순간의 생각과 일치하는 어떤 문장들을 옮겨놓거나, 어떤 이의 책을 음식 품평하듯 후기를 남기는 것이 글의 운명이었다. 

 

  이름을 바꾸었다. 블로그를 옮겼고,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글을 쓴 지 일 년 반 이상 지났다. 아무도 모르는 자리에서, 새로운 이와 관계를 맺거나 헤어졌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몇몇 환경뿐이었다.

 

  가끔 글을 쓸 것이다. 파편조각 같은 생각의 나열이 될 것이다. 나는 생활이라는 것이 없기에, 나의 생활은 글의 주제가 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없는 자서전? 어쩌면 페소아 같은 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깊이는 아스팔트 사이에 고인 빗물만큼도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쓴다. 쓰는 것만이 자유를 부여할 것이고, 부조리로 가득한 생에 순간의 활력으로 작용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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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 (Poetry, 2010)

2019.02.05 01:55

시 (Poetry, 2010)

드라마 한국 139분

감독 이창동

출연 윤정희(양미자) 이다윗(종욱) 김희라(강 노인) 안내상(기범 아버지)




  결국 시는 현실을 직시할 때 탄생한다. 하늘보다 땅을 보고, 나뭇가지에 걸린 꽃보다 땅에 떨어진 살구를 보라는 것, 시인이 '보다'가 전부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마주하기 싫은 진실과 추잡한 현실의 이면을 보려 할 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설사 알츠하이머로 모두 잊어버려도 끝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의 삶이 만든 파장과 그 결과이다. 종욱 앞에 자살한 희진의 사진을 놓아두는 것도, 결국 종욱이 그것을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의 다름이 아니다. 미자는 손자를 끔찍이도 사랑하지만, 끔찍이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이 저지를 행동에 대한 댓가를 스스로 감당하기를 바란다.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시가 되고, 아무것도 모르겠다던 미자에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한다. 

  "선생님, 시는 어떻게 쓰는 거예요?"

  "시라는 건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인데, 저분은 너무 음담패설만 하는 거 아녜요?"

  그런 물음의 반복이, 의문이, 끝없는 질문과 메모, 사색, 현실을 직시하려는 눈이 미자를 바꿔놓는다. 시란 그런 것의 집합체이고, 진정한 아름다움은 빛과 그림자의 끊임없는 교합에서 탄생하고, 삶의 깊이는 망각 대신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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